방콕 공항 노을

평범했던 하루가 특별한 하루로 바뀌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부모님께 잘 물려받은 동안 얼굴 덕분에 태국 친구들은 내 나이가 자기들보다 10살 이상 많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태국인들 문화상 딱히 나이를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서 말을 안 하기도 했지만,

굳이 안 물어보는데 먼저 얘기할 필요를 못 느껴서 말을 안 한 것도 있다.

몇 번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자기보다 형이구나 느낄 뿐 정확한 내 나이를 아는 태국 친구가 없었다.

그곳에서 처음 보게 된 그녀는 하얀 피부에 얌전하지만 밝은 기운을 가진 친구였다.

서로의 자리가 근처여서 인사하고 몇 마디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꽤 많이 겹치는 사람이었다.

태국인들은 종교적 영향으로 소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편인데, 그 친구와 나는 둘 다 최애 음식이 소고기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스테이크하우스가 맛있더라, 어디가 새로 오픈했는데 괜찮아 보이더라 하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내가 여기 한번 가보고 싶은데 가봤냐는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이었다.

그 집에 한번 가봤는데 참 맛있었다고 꼭 가보라는 그녀의 대답에

‘그럼 혼자 가기는 부담스러운데 우리 여기서 같이 식사 할래?’ 하는

절대 뱉지 말아야 할 질문까지 자연스럽게 하고 만 것이다.

물론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왜 그랬을까 하고 자책할 뿐이다. ㅎㅎ

내 편견을 부셔버린 그녀

steak house

며칠 후 그녀와 식사 약속을 한 날이 되었다.

평일이라 그녀가 퇴근 후 만나기로 하였는데, 내가 머무는 콘도에서 멀지 않은 스테이크하우스였다.

그녀의 직장은 꽤 거리가 있었고 오는데 대략 1시간쯤 걸릴 것이라 했었다.

그 당시,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 머리 속에 태국인들의 시간 개념은 빵점이었다.

늦는 건 기본이요, 뻑하면 갑자기 못 나온다고 하거나 말없이 잠수 타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그 먼 거리에서 오는데 ‘늦겠지’라는 생각에 준비를 마친 나는 출발하지 않고 집에서 폰을 보고 있었다.

약속 시간 10분 전, 그녀에게 ‘나 지금 도착했는데, 어디야?’라는 문자가 왔다.

‘얘 뭐지? 벌써 왔다고?’ 하는 당혹감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약속 시간 30분 후쯤에나 택시를 부르려던 나의 여유로움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부랴부랴 가장 빠르게 잡을 수 있는 오토바이 택시를 호출했다.

손질한 머리는 이미 오토바이 위에서 바람을 맞아 엉망이 되었고 급하게 뛰어 나오느라 옷은 이미 땀에 젖어 버렸다.

그렇게 식당에 도착한 나를 자리에 앉아 쳐다보던 그녀는 ‘너 집도 가까우면서 왜 이리 늦게 왔어?’하며 웃는데,

매번 태국인들에게 너희는 왜 이리 남의 시간을 쉽게 여기고 약속 시간에 늦냐고

핀잔을 주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었다.

아마 태국에서 처음으로 약속 시간 이전에 나온 사람을 본 것이 그날이었다.

첫인상도 좋았지만, 시간 약속을 지키는 모습에 호감이 더 올라가 버렸다.

점점 커져가는 마음

그렇게 첫 데이트를 시작으로 그녀와 계속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항상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켰고

혹시나 늦을 것 같은 날은 미리 늦는다고 연락을 해 주었다.

시간 약속에 민감했던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은 왜 다르지?’하는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호기심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점점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고 대화도 많아지며 그녀와 만나는 횟수도 늘어났다.

처음엔 가벼운 호감으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점점 마음이 커져감을 느끼며 하나의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난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사람의 시간을 이렇게 뺏는 건 잘못된 행동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었다.

늦기 전에 내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였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다시 태국에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라고 물었고

‘여행은 몰라도 지금처럼 장기로 거주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라고 나는 답하였다.

그 대답 이후에 그녀의 표정과 그녀가 한 말은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가슴에 남게 되었다.

서운함과 아쉬움이 담긴 얼굴로 ‘난 오빠가 나하고 꽤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오빠와 함께하고 싶었는데….’라며 말했던 순간이 계속 가슴에 남아버린 것이다.

“갈게.”

그렇게 짧은 두 달간의 만남을 뒤로한 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국에서 살아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 달쯤 지났나? 계속 그녀가 마음에 남아 있던 나는 ‘잘 지내?’라는 짧은 문자를 그녀에게 보냈다.

몇 번이나 참아왔었는데….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끙끙 앓느니 연락해 보고 후회는 남기지 말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왠지 좀 찌질해지고 싶었을까? 아니면 마음의 정리를 하고 싶었을까?

문자를 보낸 후 오지 않는 답장에 애꿎은 휴대폰만 계속 쳐다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로부터 답장이 왔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지만, 정작 물어보고 싶은 말은 못 꺼내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참 찌질하다….

머뭇거리는 나 자신에게 한심해 하고 있는 순간, 그녀에게서 온 한마디…

‘오빠 다시 돌아오면 안 돼? 난 오빠가 여기에 있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난 내 우유부단함을 깰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런 겁쟁이였던 것일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에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내가 한 답장은 딱 한마디….

‘갈게.’

다음 날 바로 티켓팅을 하고 떠나기 위한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그녀의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뭔가에 홀린 사람마냥 태국에서 살겠다는 결정을 했다.

철없는 어린 시절에나 할 법한 행동이었지만, 어찌하리오 이미 마음이 그곳에 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 뒤 나는 다시 꿉꿉한 공기를 맡으며 수완나폼 공항에 서 있었다.

꿉꿉함 속에 두근거림과 내 결정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마음을 간질거리는 묘한 감정을 품고서 말이다.

평범했던 하루가 특별한 하루로 바뀌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그녀와 정식으로 진지하게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3년 후…….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평범했던 하루가 그녀와의 만남으로 인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특별한 하루가 되었다.

지금 내가 태국에서 살고 있는 가장 큰, 아니, 거의 모든 이유는 그녀가 아닐까 싶다.

태국이라는 타지에서 살아가며 불편하고 불합리하고 이해가 안 되는 순간들이 매번 발생하지만,

어찌하리오, 이 또한 나의 선택인 것을…

앞으로 태국에서 살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하나씩 공유해 보려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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