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서울로 이사를 떠나시던 날, 큰오빠, 작은오빠 그리고 나는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당시 세 살이었던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갑자기 부모와 떨어진 것이다.
당시의 기억은 없다.
세 살짜리가 뭘 알겠는가?
그러나 자라면서 나는 우리가 부모와 떨어져 산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행히도 할머니는 우리를 누구보다 아끼셨다.
모두가 보리밥을 먹던 시절, 우리 형제들 밥상에는 늘 하얀 쌀밥이 놓였다.
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반 친구들이 “야~~너는 오늘도 고기반찬이네!”하고 부러워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도시락 열기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이렇게 할머니의 정성은 어린 내 삶을 든든히 지켜 주는 울타리였다.
세월이 흘러 큰 오빠와 작은 오빠는 차례로 서울로 갔다.
오빠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몰랐던 그 빈 자리가 컸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4년 후 나도 국민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할머니한테 서울 구경시켜 준다고 데려와서는 그 길로 전학을 시키셨기 때문이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할머니는 아버지한테 엄청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왜 거짓말 했냐? 니가 데려간다고 하면 내가 뭐라고 할까 봐 그랬냐? 내 지금도 손녀가 대문에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며 우셨다는 말을 듣고 나도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되신 할머니한테 마지막 남은 손녀딸마저 떠났으니 얼마나 적적하셨을까…
서울에 와서 참기 힘든 것은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하다가 6남매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보리 섞인 밥도 먹기 싫었다.
어느 날, 내가 밥투정을 하자 엄마는 무심히 말씀하셨다.
“아이구, 얘는 할머니 밑에 커서 버릇이 없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원해서 할머니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부모님이 나를 맡기고 떠났으면서…. 억울함과 서운함이 가시에 걸린 듯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그 말은 단순한 꾸지람이었을지 모르지만, 바뀐 환경에 힘겨웠던 나에게는 낙인처럼 깊게 새겨졌다.
결혼을 하고 부모님 근처에 살면서도 그 말은 종종 불쑥 떠올라 엄마를 대할 때마다 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89년도, 남편의 직장문제로 우리 식구는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부산은 아름다웠지만 아무 연고도 없어 늘 외로웠다.
그래서 방학만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친정에서 지냈다.
친구도 만나고 문화생활도 즐기면서 그리웠던 서울을 만끽했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는 날은 짐을 싸면서부터 벌써 아쉬움이 가득했다.
엄마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손을 흔들며 우리를 지켜 보셨다.
기차에서 자리를 잡고 아이들 간식을 사 주려고 가방을 열었을 때 웬 하얀 봉투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지?” 봉투안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있었다.
마음이 먹먹했다. ‘엄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후로도 엄마는 항상 내 가방안에 봉투를 넣어주셨다.
어떤 때는 백만원이 들어있기도 했다.
그건 돈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었으리라.
어릴 때의 서운함은 세월과 함께 묻히고 엄마도 이제 하늘나라로 가신 지가 25년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 그 말이 떠오른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 버릇이 없네.” 마음이 아프지도 않고, 원망도 없는데 불현듯 떠 오르는 것은 왜일까?
막 젖을 뗀 세 살짜리 딸을 떼어놓았던 엄마의 마음엔 차마 말로 다 하지 못 한 아픔이 있었을 텐데..
그것도 다 이해가 되는데 그 말은 왜 아직도 나에게 남아있는 것일까?
GPT에게 물어봤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는 상처가 아니라, 단지 흉터 같은 것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해 설명해 주었다.
아물었지만 흔적은 남아 있듯이, 그 말은 내 삶의 한 조각이라 했다.
GPT가 가장 잘 하는 분야가 심리학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가 보다.
나의 상처가 그리 깊은가 하고 고민했는데 GPT가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분명 내 마음인데 나는 모르고 지피티는 안다.
낙인처럼 박혀있던 그 말은 이제 엄마의 사랑과 함께 먼 추억으로 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