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getfulness

나이 들면서 함께 사는 친구가 있다.
이름하여 ‘건망증’.
이 친구는 허락도 없이, 또 약속도 없이, 불쑥불쑥 내 일상에 끼어든다.
안경과 핸드폰이 단골이다. 외출하려다가 얼굴이 허전해서 거울을 보면 안경이 없다.
기억이 안 나니 무조건 여기저기 찾는다.
마침내 찾으면 “아이 C, 여기 있었네” 핸드폰도 마찬가지다.
분명 아까 카톡을 했었는데 그다음엔? 또 기억이 안 난다.
겨우 찾아내면 또 “아이 C 여기 있었네”가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2시간마다 알람을 설정해 두었다.
시시때때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니 확실히 잊어버리는 횟수가 줄었다.
이 외에도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렌지에 밥을 데우려고 문을 열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통 하나, 어제 데워놓고 깜빡한 반찬통이다.
냉장고는 또 어떤가.
막상 문을 열면 순식간에 찾아오는 브레인 포그, 문 닫고 돌아서면 그때서야 갑자기 생각나는 건 뭐란 말인가?

건망증을 없애고 기억력을 좋게 하려면 머리를 많이 쓰라고 하는데 이 나이에 그럴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마침 머리 쓸 일이 생겼다.
성당에서 8월24일에 성경경시대회를 한다는 공지가 올라온 것이다.
범위는 ‘예언서’. 예상문제집을 받아 보니 70쪽으로 양이 좀 많다.
‘이 참에 머리한 번 써 볼까.’하고 용기를 낸다.
경시대회까지는 두 달 남았다.
미리 공부하면 외운 거 다 잊어버릴 게 뻔하다.
그래서 8월달에 시작했다.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 쉽지 않았다.
암기, 암기, 또 암기를 해도 계속 틀린다.
그래도 10일쯤 되자 객관식은 완전 정복,
성경 귀절 괄호넣기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데 통째로 문장을 외우는 일은 여전히 난공불락이다.
자가 테스트에서 이번에는 맞췄지만 다음에는 틀리는 일이 반복됐다.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벌써 15일이다.
전체 암송은 자신없어 포기하기로 한다.
괄호넣기 문제와 답을 녹음해서 수시로 들었다.
어느 덧 20일, 조금 초조해진다.
‘결과야 어떻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지’ ‘아니야. 결과도 좋으면 좋지.’ 마음이 복잡하다.
드디어 24일, 시험지를 받아든 가슴이 콩당콩당한다.
눈으로 훑어보니 예상문제집과 똑같이 나와서인지 익숙한 문제들이다.
생각보다 쉽게 답이 써 졌다.
운좋게 통째로 외워쓰는 문제도 마침 아는 귀절이었다.

한 달간 정말 열심히 공부했더니 뿌듯한 마음이 든다.
건망증도 나아질 것 같은 기분이다.
결과 발표가 나왔는데 뜻밖에도 3등이란다.
상장과 부상으로 3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고 나오니 사람들이 묻는다.
“그 나이에 어떻게 시험을 봤냐고,” 대단하다고 치켜 세운다.
열심히 해서 결과까지 좋으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계속 참가할 결심을 한다.

그런데 시험만 잘 보면 뭐 하나?
이제 떠나갈 것만 같았던 건망증이 아직도 내 안에 건재하고 있는데…
어제도 복지관 가려고 현관문 열다가 “아 안경!” 하면서 도로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아이 C 또!”

알고 보니 목적을 가진 암기는 건망증과 별 상관이 없다고 한다.
뇌과학자들은 건망증의 원인은 많지만 물건을 둘 때, 약속을 잡을 때 조금 더 신경쓰는 습관을 가지라고 한다.
한 40년만에 받아 본 상장 때문에 너무 좋아서, 잠시 건망증이 없어진 듯한 착시현상에 빠졌던 것 같다.
어차피 건망증은 평생 데리고 가야 할 친구,
그래도 아직은 꽤 쓸만한 암기력이 옆에 있으니 둘이 함께 가는 길이라면 견딜만하지 않을까.
“아이 C!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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